Artist pursuing practicality with the mind of a physicist
나에게 디자이너란?
실생활에 와닿는 실용적인 영역 내에서; 질문하고, 예측하고, 분석을 반복하는 사고방식으로; 틀에 박히지 않은 경험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
My Creative History
‘난 이과고 내 작품을 만드는 게 좋아’
대학교 입시를 앞두고 무엇을 전공할지 고민하던 고등학생 김승우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계산하는 게 좋았다. 과학은 내 일상을 이루는 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학문이었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순서, 배경, 수식들을 적절한 상황에 적용하면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계산해낼 수 있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내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찾아내고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게 짜릿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게 좋았다. 내가 직접 이야기할 필요 없이, 작품이 이야기를 담은 매개체가 되어 나 대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점이 좋았다. 자유롭게 창작하고 실험하고 엉뚱한 걸 발견해서 이용하는 게 재밌었다. 작품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될 때 그 또한 받아들이며 이걸 어떻게 활용해서 더 좋은 방향으로, 완성도를 높일지 고민하는 과정이 짜릿했다.
시작을 찾는 것은 잘 못했다. 그저 주어진 내용을 공부하고 정해진 숙제를 했다. 아무 재료나 가지고 실험하다가 결과물이 마음에 들면 그것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래도 그냥 단순하게, 작품을 만드는 게 좋았다. 그리고 막연하게, 물리학이 내가 배운 과학 중 가장 미술에 활용할만 해보였다. 그냥 학교 수업 시간표에 물리와 미술이 있었기에 골랐고, 욕심이 많아 두 가지를 다 하는 융합 전공을 선택했다. 딱히 물리학자도, 예술 작가도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공부하면 두 가지를 다 활용하는 나만의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I absolutely hate physics and art.'
대학교 입학 후 두 분야의 좋은 점과 싫은 점이 명확해졌다. (사실 싫은 이유 위주였다.)
원론적인 공부를 하는 물리학이 좋았지만, 세밀한 분야로 파고 들어가면 물리학은 실생활과 동떨어져 보였다. 과학의 끝은 철학이라는 교수님의 설명이 예상에서 벗어나서 좋았지만, 맨눈으로 관찰할 수도 없는 현상을 공부하는 것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봐야 하는 기초 과학 연구는 탐구의 즐거움을 충족시켜주었지만, 내 작업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눈에 보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은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최소한의 제약,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며 틀을 깨는 미술이 좋았지만, 새로운 사고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난해해 보여 예술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고민에 부딪혔다. 그래서 내 작품이 대중에게도 어필이 될지 의문이 생겼다. 어떤 물건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는 과정이 좋았지만, 그 물건을 꼭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내 작품만의 특징이 없다고 생각하니 작품 기획을 시작하기도 어려웠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방면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사고방식이 좋았다. 내가 의도한 경험을 유도하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과정이 좋았다. 하지만 끝없이 분석하고 창작하며 나만의 세상에만 빠지자니 ‘실용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 작업이 대중적인 영역에 자리하여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내 자기 효능감을 향상시켜 주었다. 그래서 미술이 아니라 디자인을 공부하는 게 나았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방탈출을 만들어야겠다!’
그러다 우연히 취미로 하게 된 방탈출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여러 장소를 구현하고, 이야기에 적절히 섞이는 문제를 배치하여 이용자가 이야기를 직접 진행하는 경험이 흥미로웠다. 직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게임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내용을 체득하고, 이용자가 게임 후에도 이야기에 대해 대화하는 점이 신기했다. 거기서 ‘방탈출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잠재력이 있지 않을까?’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재료들을 투박하게 덧대어 큰 규모의 작품을 만들고 작품 주변 공간까지 신경 썼다. 작품은 내 이야기를 담아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보관함이자 전파자였다. 나는 난해할지라도 다양한 작품의 형태를 시도했다. 방탈출은 그런 나에게 딱 맞는 가능성이었다. 큰 작품보다 더 큰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용자가 게임을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접하고 그 내용에 대해 대화하게 만들었다. 미술관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오프라인 게임이었다. 게다가 비슷한 형태의 작품을(The Privilege of Escape, Risa Puno) 찾아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졸업 작품으로 방탈출 게임을 차용한 경험형 예술 작품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전시 디자인이 답인 거 같아’
졸업 작품을 만들면서 이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이용자가 게임을 진행하며 이야기를 접하는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종합적인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로 느껴졌다. 이야기 속 장소에 맞는 공간을 구현하는 것 외에도, 이야기 속 화자의 경험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용자가 어느 단계에서 어떤 장소에 갈지, 그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지, 단서를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얻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명확한 지시문보다 공간과 소품만으로 유도해야 했다. 이것을 설계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이 작업이 방탈출뿐 아니라 전시를 만드는 데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작품을 만들 때도 작품이 놓인 공간과 관람객이 작품을 접하는 동선을 고려했다. 정체성 혼란과 그로 인한 우울감을 토로하는 조각품을 복도 구석에 기대어 숨어있듯 배치했다. 온라인상에 보이는 행복한 삶과 대비되는 구질구질한 현실을 대비시키기 위해 작품을 두 단계로 나눠 체험하도록 기획했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둥근 기둥에 글을 빼곡히 써서 관람객이 작품 주변을 빙글빙글 돌도록 유도했다. 작품 관람에 단계를 설정하고, 그 자체로 동선을 유도하는 작품을 기획하던 나에게 전시 기획은 자연스러운 확장이었다. 전시회에는 여러 작품이 있으므로 관람 동선을 설계해야 했고, 전시 공간 전체를 디자인하면 동선을 유도하기 더 쉬울 터였다. 그래서 전시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굳이 전시 디자인이어야 할까? 세상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전시 디자인에 회의감이 들며 상업 공간 디자인에 스며드는 과정은 천천히 이뤄졌다. 미디어아트 전시 스태프로 근무하고 전시 공간을 디자인하며 투사되는 영상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와닿지 않는다고 느꼈다. 나는 실재하는 환경과 그 현실감을 조성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 전시 스태프로 근무하면서 동선대로 관람하지 않는 관람객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모든 동선에 의미를 담아 전시를 구성하는 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효율적인 기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우연히 구독한 한 뉴스레터가 내 시선을 돌려주었다. 특정 브랜드나 인물을 소개하고, 떠오르는 기업의 사업 전략을 살펴보고, 세계적인 트렌드를 읽어주는 내용을 보면서 이 이야기를 공간에 녹여내는 상상을 했다. 브랜드나 인물의 철학을 담은 공간, 기업의 마케팅에 활용되는 공간, 성장하는 시장의 흐름에 올라타는 공간. 모두 그 공간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 경쟁력이 되는 공간이었다.
전시를 디자인하며 공간을 미학적으로 꾸미는 것을 넘어서, 공간 경험을 설계하는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 경험이 처음부터 끝까지 공간의 정체성에 충실한지, 이용자가 공간의 목적과 분위기를 만끽하는지 항상 확인했다. 여기서 공간을 전시회 대신 브랜드 매장으로 바꾸니 뉴스레터 내용을 대입하기 쉬워졌다. 브랜드는 브랜드를 알리고 브랜드의 정체성에 공감하는 고객을 찾아야 한다. 그 정체성을 타깃 고객 페르소나로 봤을 때, 공간을 활용하여 고객을 끌어오는 방법은 그 페르소나에 어울리는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만들어 잠재 고객의 관심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그 경험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 재밌어 보였다.
이런 공간 디자인은 내 관심사를 모두 충족시켜줄 것 같았다. 내 창작물에 무슨 이야기를 담을지 정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브랜드나 개인 등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를 낱낱이 분석해서 담으면 되었다. 작품을 만들 때부터 공간과 사람의 동선을 고려했고, 종합적인 경험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면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경험을 만들고 그를 유도하는 공간을 구성하면 되었다. 매번 난해하지 않은지, 지나치게 이상적이지 않은지, 대중적으로 어필이 될지 고민했다. 그렇다면 실용성, 대중성을 반드시 챙겨야 하는 공간,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목표인 공간을 창작하면 되었다.
그렇게 상업 공간 디자인에 도달했다. 질문하고 분석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고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새로운 경험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작업을, 대중이 이용하는 공간에 구현하는 일. 물리학과 미술, 방탈출을 버무리고 뉴스레터 양념을 친 7년간의 자기 통찰과 계발 끝에 도출한 결론이었다.